개혁된 교회는 목사의 설교에 관해 당회에서 토론하는 훌륭한 유산을 오래 전부터 지켜오고 있습니다. 사실 목사의 설교를 토론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고백적으로 설교는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에 대한 이렇게 숭고하고 높은 개념을 생각한다면, 무조건 설교 말씀에 청종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으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만이 선포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목사의 정통성은 직분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직분에 합당하게 사역하는 데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회에서 갖는 목사의 설교에 대한 토론 시간은 이것을 성립시켜주는 아주 좋은 뒷받침입니다.
물론 개혁된 교회가 이 전통을 성문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대로 좋은 전통으로 인식되어 왔기에 자연스럽게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본래 당회는 기본적인 치리기관으로서 교회를 다스리고 감독할 뿐 아니라, 교회의 신령한 유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찍이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당회원들(장로들)을 불러 일깨워준 사명에 따른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 밖에서 교회 안으로 거짓 스승(흉악한 이리)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교회 안에서도 복음 진리에서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가 일어나게 될 것이므로, 장로들이 교회의 감독자로서 복음의 진리를 잘 파수해야 한다고 권고했던 것입니다(행 20:17~31). 그러기에 개혁된 교회의 당회는 먼저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는지에 유의하고, 동시에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대로 생활에서 잘 열매 맺어가는가를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의 설교에 대한 토론 시간을 갖는 것은 그러한 일의 일환입니다. 따라서 목사의 입장에서 당회의 설교 토론 시간은 당연히 긴장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의 목적은 목사의 설교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교회 전체의 신령한 유익을 위해 목사의 말씀 선포를 격려하고 도움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목사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설교가 토의의 주된 대상이라는 데서 신경이 예민해지기 마련이므로, 사소한 표현에도 자극을 받기 쉽고 필요 이상의 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개혁된 교회의 목사들 중에서 이 설교 토론 시간에 대한 무용론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항상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시간을 통해 자신의 말씀 선포 사역에 유익을 얻게 되고, 따라서 교회에도 신령한 유익을 끼치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설교 토론 시간이 되면 먼저 장로들은 목사의 설교에 감사를 표합니다. 교인들의 가정 심방을 통해 그들의 생활 속에서 설교의 결실이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또한 목사가 설교를 위해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얼마나 치열하게 봉사했는지 재삼 확인하면서 목사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것입니다. 토론의 과정에서 장로들이 예리한 질문이나 뜻밖의 질문이 목사를 당황스럽게 할 때도 있지만, 오해가 있었다면 목사는 충분한 해명을 하게 되고, 합리적인 문제의 제기였다면 목사는 이를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다음 설교를 위해 참고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은 목사로 하여금 성경 중심의 설교를 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은 자명합니다.
대체적으로 개혁된 교회의 신자들은 성경 지식과 교리에 아주 해박합니다. 칼빈의 주석과 기독교강요뿐만 아니라 성경 연구를 위한 이런저런 도서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목사의 설교에 아주 예민합니다. 통상 교인들은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될 때에 “아, 바로 그 내용의 설교구나!” 하면서 즉각 방향을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 그에 따라 목사의 설교를 더욱 신뢰하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받는 자세에 있어서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베뢰아 성도들이 성경으로써 바울의 말을 상고한 것과 비슷한 경우입니다(행 17:11).
설교에 대한 공적 토론은 분명 목사에게 부담이 되지만, 진정한 목사라면 이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타락이 말씀의 타락에 기인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는 사실입니다. 설교 토론 시간은 목사로 하여금 설교를 위한 성경 연구와 교리 학습에 열심을 내게 해주는 ‘선한 멍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은 일단 목사가 되고 나면 다시는 누구에게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설교 토론 시간이 사라진 것도 이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자신의 설교와 생활 태도에 대한 부드러운 충고나 권면은 물론 발전적인 건의도 거의 맹목적으로 배척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베드로 같은 훌륭한 사도도 자신이 외식에 대해 한참 후배인 바울 사도로부터 지적과 책망을 받은 적이 있지만(갈 2:1~21), 결코 분노하거나 불쾌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교회를 더 잘 섬기기 위한 정당하고도 사심 없는 비판과 충고를, 단지 자신이 목사라는 이유만으로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법리에 맞지 않고 본인 자신에게도 결코 이롭지 않습니다.
한국의 대다수 대형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것은 ‘말씀주의’가 아니라 말씀으로 치장한 ‘담화주의(談話主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세우지만 전체 내용은 세상 사상으로 일관하고, 성신의 인도를 부르짖지만 실상은 자신의 인본주의 종교심의 발휘일 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담화주의가 교회의 외적 성장을 이끄는 일등 공신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대형화는 그 자체로서 죄악이요, 타락한 교회의 대명사라는 데 대해서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가 개혁되려면 담화주의가 아닌 말씀주의가 자리잡아야 하는데, 당회에서의 정기적인 설교 토론 시간은 이를 뒷받침해둘 수 있는 훌륭한 대안이 될 것입니다. 사라져버린 개혁된 교회의 훌륭한 유산은 이제라도 속히 회복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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