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교회를 설명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왔습니다. 이러한 시도들이 반복되면서 개념 정리 및 사상 확립이 대체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정의하자면 교회란 ‘성도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고, 가장 사실적인 묘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직신학적 차원에서 보자면, 대체적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교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의 삼대 구별(무형 교회와 유형 교회, 전투적 교회와 승리적 교회, 유기적 교회와 조직적 교회)이요, 둘째, 교회의 삼대 속성(보편성, 거룩성, 통일성)이요, 셋째, 교회의 삼대 표지(말씀 선포, 성례 시행, 훈련 집행) 등입니다. 여기에 넷째, 삼대 권세(교리권, 입법권, 재판권)를 더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조직신학적 정의는 교회가 개혁되던 당시에는 시도될 만한 여유가 없었고, 이후 개혁교회가 자리를 잡게 되면서 일어난 활발한 신학적 작업을 통해 후기 정통 개혁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교회를 좀 더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기 전까지 개혁자들은 자칭 교회인 로마 카톨릭 교회를 부정하면서, 신앙고백 차원에서 교회의 정의에 대한 나름의 견해들을 내어놓았습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본격적으로 교회를 섬기기 시작하면서, 간략하지만 총 21개조로 구성된 ‘제네바 교회 신앙고백’이 작성되었고, 향후 다른 신앙고백들을 통해서 좀더 구체화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제18조에서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습니다.
“오직 하나의 예수 그리스의 교회가 있지만, 우리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신실한 자들의 모임이 불가불 요구된다는 것을 항상 인정합니다. 물론 이러한 모임의 각각이 교회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모든 모임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자신들의 신앙 없는 행동을 통해 주님을 모독하고 오염시키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혹여 어떤 불완전함이나 잘못이 있더라도 주님의 거룩한 복음이 순수하고 신실하게 설교되고, 선포되고, 청종되고, 지켜지며, 그의 성례가 올바르게 시행되는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올바르게 분별하는 바람직한 표지라는 사실을 믿는데, 그러한 곳에는 항상 사람들 중에 교회가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복음이 선포되지 않고, 들려지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은 곳에서는 교회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황의 법규에 의해 다스려지는 교회는 기독교가 아니라 오히려 마귀의 회당입니다.”
이 신앙고백의 기여 또는 특징은 ‘교회를 올바르게 분별하는 바람직한 표지’라는 표현으로서, 복음의 설교와 선포, 청종과 순종 및 성례의 올바른 시행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표지는 훗날 칼빈에게서 계속 강조되었고, 세계 최초의 개혁교회(1559)인 프랑스 개혁교회 및 세계 최초의 장로교회인 스코틀랜드 교회의 신앙고백에서 다시금 확정되었는데(1560), 이는 제네바 교회의 신앙고백을 좀 더 정교화시킨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표지를 삼대 요소로 고백하는 이러한 입장은 다음 해에 작성된 벨기에 신앙고백에서도 다시 등장합니다(1561).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제18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고백하고 공언하는 참된 교회의 표지가 있습니다. 첫째,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저술에서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선포, 둘째,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고 확증되도록 결합시켜주는 그리스도 예수의 성례전의 올바른 시행, 끝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규정처럼 악덕이 억제되고 선행이 육성될 수 있도록 바른 교회적 훈련의 시행 등입니다. 이러한 징조가 보여지고 계속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언제라도 숫자가 많든 적든 자신의 약속에 따라 그 중심에 의심할 것 없이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존재합니다.”
이상의 제네바 신앙고백,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그리고 벨기에 신앙고백 등은 한결 같이 교회의 표지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와 같은 교회의 표지에 대한 입장은 제2차 스위스 신앙고백을 통해서도 아주 긴 설명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되었습니다(1566). 그런데 제네바 교회 신앙고백에서는 거짓 교회의 대상이 로마 카톨릭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의 종결이랄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이르러서는(1643-9), 거짓 교회는 사탄의 모임이라고 직설되면서, 그들이 이미 개신교 안에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는 양상인 것을 알게 됩니다(제21장 5조).
이제 현실 문제로 돌아와서, 오늘날 주변의 교회들의 모습을 보면 이러한 교회의 삼대 표지가 어느 정도나 갖추어져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표지는 교회의 존재 유무, 아니 진위를 가늠하는 잣대입니다. 표지가 없으면 교회도 없는 것이고, 표지가 있을 때 비로소 참된 교회가 있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는 항상 표지를 보전하고 구현하는 문제에 사활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케 됩니다. 좀 식상한 비판일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 교회에 대한 정의가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가 토대로 삼고 있는 신앙고백(삼대 표지)’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그만큼 우리의 신앙고백이 허술하다는 숨길 수 없는 반증일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타락은 이미 구조적 모순으로 자리잡은 채 제도권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개혁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와의 생명적 연합의 필수성을 부수적인 조건 정도로 여기는 신학교들이 교회 운운한다는 것도 이미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아예 교회를 이루고 있지 않는 교수들도 있어서, 결국 이론으로만 신앙과 교회를 가르치는 모순도 버젓이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혀 수영을 할 모르는 사람이 학생들에게 수영을 가르치는 것과 같은 모순입니다. 더 나아가 총회나 노회 편에서도 소위 한국 교회 특유의 교회 개척이라는 이상한 현상을 조장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목사 한 개인이 적당한 건물을 임차해서 무슨무슨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길거리로 나가서 전도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는 이런 괴이한 현상은, 사실상 자기부정의 극치로서 수많은 오류의 원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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