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생활의 치열성에 대한 주제를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성도가 교회의 지체로서의 책무를 다하려고 할 때, 다른 무엇보다도 십계명의 가르침을 잘 받들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도덕률들의 핵심을 잘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라면 당연히 십계명에서 요구하는 덕목들을 잘 실천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는 동기나 내용은 세상의 도덕주의자들과는 전혀 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윤리학을 기본 목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행여라도 그런 차원이라면 세상 것들 중에서도 오히려 성경보다 더 풍성하고 깊은 내용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십계명을 대표로 하는 성경의 도덕률이 의도하는 바는, 첫째, 인간은 시종일관 죄인임을 강조하는 것이고, 둘째, 율법을 내신 동시에 실현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이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바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조목조목 하나님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는 까닭에 율법을 잘 실천해 나간다면, 성도의 품성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게 됩니다. 십계명은 그것의 중심 사상인 사랑을 구체적으로 두 가지 덕목으로 실천해 나가도록 가르칩니다. 첫째는 성도의 영혼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그런 상태를 일상으로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사랑의 정조’라고 합니다(신 6:5; 11:13). 둘째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인데, 이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그러한 상태로부터는 반드시 흘러나오기 마련입니다(레 19:18; 마 22:37, 39). 사랑이라는 것은 감정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역동적인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웃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대상을 우리 앞에 놓으심으로써, 당신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실천적으로 표출하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말은 ‘그를 섬기고’, 나아가 ‘그를 위해 헌신한다’는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이와 같은 차원의 사랑을 서로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이것은 순전히 의무로써 강제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이 누군가의 ‘희생적인 사랑’을 받았다는 데 근거한 감사의 반응으로 그렇게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사실을 근거로, 우리도 동일한 사랑을 베풀 것을 ‘새로운 계명’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요 15:12).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한없이 부끄럽고 초라해지고, 그야말로 몸 들 바를 모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움츠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앞을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거북이 걸음일지라도 전진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단 전진하고 있다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앞에서도 암시했듯이 ‘도덕 운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역설입니다. 또한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소위 영차, 영차 하는 식의 운동 전개를 통해서 사랑의 열매를 맺어 나가려 할 경우, 이내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 반대 급부가 주어지지 않는 한 결국에는 시들시들해져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가령 개혁교회의 창시자 칼빈은 성경적으로 정확한 교회를 추구하려 했지, 단지 인간들의 잘못된 도덕이나 타락한 행위를 바로잡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성품은 세상 사람들의 도덕성을 월등히 초월하게 되었습니다. 이 원리는 “다른 사람들은 생활을 말하였지만, 나는 교리를 말한다”고 했던 개혁자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입장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즉 종교개혁은 단순히 인간의 잘못된 윤리나 행위를 고쳐보려는 차원의 운동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물론 고등한 윤리나 도덕은 항상 참된 신앙의 열매이기 마련입니다. 바른 신앙의 나무에서 비로소 좋은 열매가 맺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무가 무엇이냐 할 때, 일차적으로는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될 수 있겠지만, 좀더 구체적으로는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입니다. 좀더 정확하게는 나무는 교회요, 그리스도인들은 가지입니다. 이때 나무는 나무다워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무는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어야 합니다. 정말 포도나무라면 기필코 포도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참되고 살아 있는 나무에 접붙여진 가지들이라면 열매를 맺는 일은 본성의 활동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칼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신령하게 예배드리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의 공정한 법도를 따르며, 마지막으로 깨끗한 양심과 신실한 믿음과 사랑을 소유하는 것을 배우기에 만족하지 않는 자라면, 도대체 그런 사람은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 것인가?” 성도들 개개인이 이와 같은 마음으로 한결 같이 연합되어 있는 데서 비로소 ‘바른 교회’로서의 ‘정체성’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 때문에 성도의 십계명 준수는 일종의 운동이기에 앞서, 거듭난 생명력의 자연스러운 표출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의 지상적 표출 방식인 교회, 바로 그 교회가 지닌 생명력의 발산으로 말미암아 가지요 지체들인 개개인 성도들의 삶에서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계명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계명’이 성취되는 모습이 현저하다 하는 말입니다.
행여라도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에 성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면, 그러한 토대에서 제아무리 영차 영차 하면서 소위 도덕 운동이나 사랑 운동을 전개해봐야 일시적일 뿐이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열매의 진정성 문제도 따라붙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성도로의 변화됨’이라고 하는 토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세속주의의 위선이 덕지덕지 붙은 것이므로, 진정한 열매라고 볼 수 없기 마련인 때문입니다. 성도가 십계명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으려면, 참된 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가지로서 치열하게 연합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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