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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생활의 치열성에 대한 각성 ③


당연한 말이지만 무슨 무슨 교파의 교회이다 라고 간판만 내걸었다고 해서 무조건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백화점 같이 웅장하고 호화로운 성전인지 신전인지 하는 건물을 갖고 있어도 그 자체만으로는 아닙니다. 거기에 목사와 성도가 있어서 그럴듯한 기독교적 분위기의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역시 그 자체만으로는 교회가 아닐 수 있다는 원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요즈음은 진리의 척도부터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시대이지만, 교회 문제와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덩치 하나만 떡 하고 내밀면 만사가 다 정당화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철두철미 세상 논리입니다. 크고 많은 것은 정통이다 하는 말은 철저히 거짓말입니다. 혹여 그렇지 않다면, 개신교보다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더 정통이고, 로마 카톨릭 교회보다는 세상이 더 정통일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을 좁혀서 개혁교회 안에서만 살펴봅시다. 개혁교회가 정통인 증거는 무엇입니까? 역사적 개혁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바대로 교회의 삼대 표지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 움직일 수 없는 사활적인 진리를 제쳐 두고, 단지 많고 크다는 이유를 들어 참된 교회 운운하는 경향에 지배적이 되었습니까? 거두절미하고 신앙고백이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증명해 보겠습니다. 교회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몸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한 단계 더 들어가게 되면, 이후로는 겉잡을 수 없는 중구난방의 대답들이 튀어나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한 대답들 중에는 자기들 교회의 반석인 신앙고백과 배치되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성도라면 교회 생활을 가히 자신의 생명 이상으로 여길 만큼 치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지 않고는 구원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성경적 교회여야 한다는 전제가 따라 붙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성도 자신이 몸의 한 지체라는 문제 앞에서 범사에 신실하고 충성스러워야 합니다. 자기는 팔짱 끼고 방관만 하는 상태에서, 자신이 속한 교회가 교회다워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가지 말라! 교회가 되라!” 라는 진리가 표어로써 등장하는 것입니다.


가령 이사를 가야 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뻔히 생각하고 있는 그렇고 그런 문제들이지, 자신의 몸을 안전하게 의탁할 바른 교회에 대한 고려는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신에게서 교회의 비중이 그런 정도라면 주님의 마음을 슬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이사 가려는 곳에 바른 교회가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이사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교회 생활 또는 교회 이루기는 영원한 생명이 걸린 문제이므로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대형교회라고 하는 닭장 속에 안주해 있으면 혹 편안할 수는 있겠지만, 자칫 잘못 자신의 영혼이 썩어 들어가다가 마침내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위험을 대가로 지불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형교회는 이미 그 자체로서 바른 교회가 아닐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유기적 공동체가 아니라, 사람의 종교심에 의해 잘 엮어진 조직체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작은 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옳고 안전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대형교회이기 때문에 틀렸고, 따라서 궁극적 구원의 완성이 불안할 가능성은 훨씬 더 큽니다. 올바른 교회의 품에 안기는 문제 앞에서 치열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정통 교회가 대한민국에 없다면, 그렇다면 그러한 교회가 있는 곳까지 이민이라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이루기의 치열함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신의 교회 생활이 헛되지 않으려면, 먼저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안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 말을 깨닫는 사람이라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부부 간에, 부자 간에, 주종 간에 상호 갖추어야 할 자세를 이야기 하던 중에 갑자기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라고 외치면서, 갑자기 앞뒤 문맥에 전혀 맞지 않는 송영을 쏟아낸 데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앞에서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라고 한 것입니다.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설명함에 있어서, 이 이상 확고부동한 경험적 차원에서 이야기 한 곳은 몇 군데 되지 않습니다.


교회 생활이 치열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베푸심의 의미도 충분히 깨달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무상의 은혜로 베푸시는 것이로되, 그렇게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교회 생활에 치열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이는 미쁘시도다”(고전 1:9)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교제한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흔히 생각하는 ‘친교’ 정도에 그쳐서는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 이루기, 곧 교회 이루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은 종교성만 강렬하면 아무나 나서 목사가 되는 시대가 되어버렸고, 그들이 먹고 사는 수단으로 교회를 차리는 것이 당연시되는 시대가 되어버렸으므로, 성경의 교회, 올바른 교회, 역사적 개혁교회를 주의 깊게 찾아 보아야만 합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 생활의 치열성에 대한 각성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 방식임을 다시 한 번 명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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