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성도가 자신을 올바르고 정당한 교회생활의 영역에 가져다 놓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세상적 삶의 자리에서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는 만큼 교회생활에서는 더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상에서의 태도보다 좀더 진지하고 순결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것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중차대한 원리는 정확한 삶의 태도를 요구합니다. 이것도 가능하고 저것도 가능하다는 식의 중간지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생명의 원천임을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하고, 굳게 신뢰해야 합니다. 지식과 신앙과 신뢰는 각기 구별되는 개념이긴 해도, 항상 삼위일체로서 연결될 때에 비로소 각각의 의미도 제대로 살아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반사가 아닌 영생의 영역에서 그렇다는 말이요,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원인이 있듯이, 보다 넓은 차원에서 보건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배후에는 항상 하나님의 돌보심이라고 하는 원인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성도로서는 이 절대적 진리를 알고,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접붙여져 있다는 데 대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신뢰한다는 것은, 결국 삶 또는 생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은 때문인 것이고, 그렇다면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때문이라는 데 대한 생명과도 같은 확신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들 각인 각인에 대해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도 정확한 주권을 대변하는 표현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려는 의지 혹은 계획이 하나님께 있으시면,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쯤만 얘기해도 벌써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최종 형태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 데 따라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있다는 의미이고, 동시에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기까지 하셨으니, 기타 다른 것들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는 말입니다. 바울이 외친 바대로 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신뢰하고 있는 데 대한 표징 또는 증거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단, 자기 자신의 주관적인 믿음 또는 심리적인 확신은 근본적으로 배제하겠습니다. 그것은 상호 쭉 연결되어 있는 결정적인 증거들과 결부되어 있지 않는 한 독립적으로는 성립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론적인 정의부터 내려본다면, 단연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 방식인 교회 이루기에 가담되어 있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들어 이렇게 저렇게 말하기에 앞서, 이미 경험적으로도 증명되는 진리입니다. 마치 어떤 특정한 죄가 법률에 의해 구체적으로 지적되지 않을지라도 이미 자신의 양심에서 깨달아지듯이, 그처럼 교회 이루기를 벗어난 상태에서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면서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결코 없는 법입니다. 이것은 논리적 증명이기 앞서 경험의 문제인데, 하지만 반드시 논리적으로도 잘 깨달아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알고 믿고 신뢰하는 삼위일체로서의 신앙도 굳건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당연한 문제 앞에서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지 모릅니다. 첫째, 교회에 대한 각성이 치열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 따라서 당연히 교회를 이루는 삶도 치열하지 못하기 마련이지만, 셋째, 혹 이 두 가지에 걸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헛된 열심’이라고 하는 함정은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이루는 삶의 모습이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 식밖에 안 되고, 조금 심하게 표현해보면 호박에 줄 그어 놓고 수박이라고 우기는 격입니다. 오늘날 군맹무상(群盲撫象)이라 했듯이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 식’으로 교회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자신의 좁은 식견에 따라 교회를 정의하고, 교회 생활을 규정 짓는 사람들이 정말 적지 않습니다. 부분만을 보고, 그것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처지이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고집스럽게 붙잡고 나가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멈추려는지!
교회를 이루는 삶에 정확하고 치열하지 않다면, 어느 누구도 복음을 제대로 그리고 충분히 깨달은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삶’이라고 했지 ‘지식’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에 유념해야 합니다. 물론 지식도 그것이 충분하고 올바르다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지만 말입니다. 요즈음과 같은 인터넷 시대에는 그럴듯해 보이는 정보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더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정리해 보자면,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은 우리의 신앙의 영역에서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 잘 파악되고 적용되고 있는 데서, ‘지식과 믿음과 신뢰’로서의 신앙의 실질이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다시 우리가 지금 현재 ‘치열하게 이루고 있는 교회 생활’이라고 하는 실질적인 영역을 가리킵니다.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지금 교회를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그렇게 아는 지식과 신앙생활이 옳다고 확신합니까? 그와 같은 확신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Comentári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