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한 이후에야 비로소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 내려간 후 하나의 민족을 형성할 만큼 놀랍게 번창하였지만, 정작 애굽 사람들로부터 이방 민족 취급을 당하다가 끝내는 종의 처지로 전락하여 갖은 고생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일찍이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을 기억하신 하나님께서 그러한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심으로써,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비참했던 오랜 종살이를 끝내고 가나안 땅에서 주권 국가를 건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정복 사역을 마치고 마침내 주권 국가를 세움으로써, 그들은 명실상부한 하나님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통치자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통치를 받는 백성이 있고, 통치 수단인 율법이 있고, 통치권이 미치는 영역으로서의 영토가 있음으로써 성립됩니다. 이후 하나님 나라가 존속해 나온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이 구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고 있음을 실증하는 중요한 표징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인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고 있다는 표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교회의 한 지체가 되어 있는 사실’입니다.즉, 하나님의 은혜는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총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는 구약에서 그토록 많이 ‘가나안 땅에서’라고 했던 표현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한 표현으로 대체되어 동일시되는 이유입니다.
즉 다시 말하자면, 한 사람의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바로 ‘교회의 한 지체로서 성립되어 있는 삶’을 가리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개혁교회 성도라면 의당히 교회의 한 지체로서 자리매김하는 데 부단히 열심을 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구원 받았다’는 말과 ‘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말은 호리만큼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실로 구원과 관계된 모든 것들은 논리적으로든 실체적으로든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합니다. 가령, 개혁교회는 성도의 구원에 대해 논할 때, 가장 먼저 그가 창세 전에 선택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합니다. 이때 그냥 단순히 선택되었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과 연결시킵니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도의 중생에 대해 말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중생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이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지는 일이라는 것이 핵심이 됩니다.
그러면 이 단계에서 구원과 관련하여 그토록 중요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현재 어디에 계시는가 하는 문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덤에서 부활되신 후, 자신이 그처럼 부활되신 데 대한 증거를 객관화시키시려고 40여일 동안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고, 그러하신 끝에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로 가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가신 것으로 끝내지 아니하시고, 성신님의 신비한 역사 안에서 여전히 이 지상에 임재하시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 교회가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상징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혹여 교회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본체이다’라는 표현을 쓴다면 자칫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런 정도로까지 생각해야 할 만큼 실제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 역시 부인하지 못합니다.
교회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그것은 본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비유로만 생각해서도 안 되고 정확하게 말해서 실질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란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 방식이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물론 이 놀라운 일은 성신님의 신비한 역사에 의존되어 있습니다. 성신께서는 성도의 생명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연합된 성도들이 상호 연락하고 상합하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될 때에, 바로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이렇게 이해해 보겠습니다. 주님의 만찬에서는 떡을 섭취하고 포도주를 마십니다. 이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는 ‘화체설’을 주장하고, 루터 교회는 ‘공재설’을 주장하고, 츠빙글리는 ‘기념설’을 주장하지만, 개혁교회는 ‘영적 임재설’을 주장하게 됩니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성도가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실 때에,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일이 ‘일어난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사실 우리로서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성경이 선포하는 명백한 진리이므로, 우리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임재설’이라고 가르침을 통해 성찬에서의 ‘표징’과 ‘약속’과 ‘실효’ 등의 관계를 명쾌하게 확정한 칼빈조차도 이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고 했던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에 이는 비유적인 설명이긴 해도, 단순히 비유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부활하시어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곧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 방식’인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다. 진정 우리의 구원은 교회를 이렇게 이해하면서, 이러한 교회 이루기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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