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이어서 교회의 찬송 문제를 이어가겠습니다. 불과 20-30년 전에 소위 ‘복음 성가’라는 인본주의적이며 알미니안주의적인 음악이 교회의 공예배에 도입되는 현상이 일기 시작할 때, 뜻있는 이들은 걱정과 우려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한술 더 떠서 ‘찬양과 경배’ 혹은 ‘열린 예배’라는 명분 하에,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온갖 악기를 동원하여 거의 오락에 가까운 노래(Contemporary Christian Music)를 ‘찬송’이라면서 부르는 것이 마치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가 물려받은 훌륭한 유산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첫 사역을 시작할 당시 의회에 제출한 ‘제네바 교회 조직과 예배에 관한 제안서’를 통하여, 모든 교회들이 예배에서 ‘시편을 찬송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또한 한때 제네바에서 추방되었던 칼빈이 제네바의 재초청을 받아들여 귀환할 당시에도, 자신이 허용할 수 있는 14개의 양보 조건을 제시했지만, 성찬 시행과 시편 찬송은 끝까지 고수했습니다. “… 더 자주 성만찬을 시행해야 한다. … 그리고 공예배의 한 부분으로 시편 찬송을 규정해야 한다.” 훗날 이 내용이 회의록으로 기록되어 제네바 의회에 전달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제네바로의 귀환 이후 칼빈이 자신의 개혁을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칼빈이 제네바를 떠나 스트라스부르크의 프랑스 난민 교회를 맡았을 당시에(1538년 9월), 여기서 클레망 마로라는 유명한 작곡가를 만나 함께 시편에 곡을 붙이는 작업을 하였고, 마침내 칼빈의 스트라스부르크판 시편 찬송이 발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1539년판 시편찬송은 칼빈이 다시 제네바에서 목회하던 1542년에 ‘제네바의 기도와 찬송의 양식’에도 채용되었으며, 1562년에 최종적으로 완성된 ‘제네바 시편 찬송가’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찬송의 개혁 정신은 세계 최초의 개혁교회 총회라고 할 수 있는 도르트 회의에서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1618-19년에 도르트 총회는 교회 헌법에서 다윗의 시편 150편만이 교회 안의 유일한 찬송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시켰습니다(69조). 그 이후 예배에서 일반 찬송은 부르지 말고 오직 시편 찬송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논쟁을 불러일으켰을 때에도, 다른 사안들에 대한 개혁 문제와 더불어 당시의 네덜란드 국가 교회로부터 개혁교회가 분리되어 나올 때, 개혁자들은 오직 시편만을 찬송해야 한다고 지지했습니다(1843). 이와 유사하게, 미국에서도 미국 개혁 교회(Reformed Church of America, RCA)에서 기독 개혁 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 CRC)가 분리되어 나올 때 이들은 시편 찬송만을 부르도록 결정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 개혁 교회는 예배 중 다른 찬송 부르는 것을 허용했고, 기독 개혁 교회는 이에 반발하여 그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찬송 개혁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3-47년)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 시편 찬송 연구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신앙고백서를 언급하지 않고는 충분치 못합니다. 실제로 (공예배에 관한 한) 시편 찬송만 부르는 전통을 고수하지 않는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정신을 위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내용 자체도 필연적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장’은 ‘예배와 안식일’이라는 제목의 장인데 5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 마음에 은혜로 시편을 노래하는 것과(골 3:16; 엡 5:19; 약 5:13),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성례를 합당하게 집행하고 값있게 받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통상적인 종교적 예배의 모든 요소들이다(마 28:19; 고전 11:23-29; 행 2:42) … .” 이렇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예배시에 ‘시편으로 찬송하라’고 명확하게 규정했습니다.
여기서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작성한 ‘예배 모범’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공적으로 찬송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회중이 함께, 또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시편을 찬송할 것이다. 시편을 찬송하는 데 있어서 목소리는 곡조에 맞게 엄숙하게 낼 것이다. 그러나 제일 조심할 것은 이해를 가지고 마음에 은혜를 가지고 주님께 노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온 회중이 다 함께 불러야 하므로 읽을 수 있는 자는 다 시편 책을 가질 것이요, 다른 사람들도 나이나 다른 조건으로 불능이 되지 않는 한 읽는 법을 배우라고 권면할 것이다. ... .”
이상과 같이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신앙고백’과 더불어 ‘예배 모범’을 통해서도 공예배시에 어떠한 찬송을, 어떻게 불러야 할 것인가를 정확하게 명시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한결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른다고 하면서, 정작 음악 예배니 뭐니 하는 이상한 짓을 하는 현대 교회의 현실을 보면 참으로 딱하기 그지 없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개혁이란 예배의 회복에서 완성에 이른다는 점을 고려할 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칼빈은 거짓 예배를 교회에서 정화하기 위하여 성상철거, 미신타파, 음악의 우상화 철폐, 단순한 성경적 예배로의 복귀, 말씀에 대한 강조, 예배자가 이해할 수 있는 서민적 언어의 사용을 통하여 경건하고 순수한 영적 예배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는 칼빈의 전통을 떠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특별히 찬송의 우상화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렉 바로우(Reg Barrow)의 ‘성경과 역사에서의 시편 찬송’(Psalm singing in scripture & history)에 의하면, 라오디게아 공의회(The Synod of Laodicea, A. D. 343)와 칼케돈 공의회(the Council of Chalcedon, A. D. 451) 때부터 이미 사적인 찬송을 금지하는 결의를 해야 할 정도로 이 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칼빈은 교부들의 시대와 교회사에 관한 학식이 출중했던 사람으로서 당시의 예배 찬송의 혼란 문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이것이 로마 카톨릭 시대를 거치면서 아예 상식처럼 자리잡은 폐해를 파악했기 때문에 이런 일련의 개혁 진리를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윌리암슨(G. I. Williamson)도 말하기를,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일은 영감 받지 않은 찬송이 처음 등장한 것은 정통교회에서가 아니라 이단집단 중에서이다. … 만일 최초부터 교회가 영감 받지 않은 찬송을 짓고 부르도록 사도들로부터 권위를 부여 받았다면 그런 일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런 일은 오히려 믿음을 떠난 사람들 사이에서 처음 나타났다”(G. I. Williamson, The Singing of Psalms in the Worship of God <SWRB, bound photocopy, 1994>, pp. 16-17.)고 했습니다. 또한 부셀도 덧붙이기를, “9세기에도 순수한 시편 찬송을 지지하는 초기 공의회들에 주의를 환기시킨 사실이 발견된다”고 했습니다(Bushell, Songs of Zion, p.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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